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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

공세리 성당을 찾아

기사입력 2009-03-26 12:00:00 최종수정 2009-03-26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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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석 (온양고 교사 / 아산향토연구회)


 


 지난 2월 16일에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선종(善終)하셨다. 천주교 신자는 물론 많은 국민들이 애도함은 물론이고, 자신을 돌아보며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우리도 생각하고 느껴보기 위해 인주면에 있는 공세리 성당을 찾아가기로 한다.


역사와 신앙, 그리고 아름다움이 있는 곳


 멋진 모습 속에 소박함이 있고 고요한 가운데 치열함이 있는 곳, 그리하여 강인함과 온유함이 함께 하는 곳, 오랜 역사 위에 현재의 삶이 있는 곳이 공세리 성당이다.


 1890년에 우리나라에서 아홉 번째, 충청도지역에서 가장 먼저 세워졌으니 이미 119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천주교 역사에서 순교와 믿음의 성지일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성당으로도 그 명성이 대단하다.


 공세리는 중국과의 주요 교통로 중 하나인 아산만 입구이고 충남 서북지역인 내포지방의 관문이었기에 오랜 기간 동안 주요 문물의 수용과 교류에서 중요한 거점이었다.


 곡교천·삽교천·안성천이 아산만에 접하는 인근 지역이기에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또한 조선시대에 세(稅)로 걷은 곡식을 모았다가 서울의 경창으로 운반하는 공진창(貢津倉-공세곶창)이 있던 곳이다. 공세곶은 늦어도 1425년(세종 7)부터는 조창의 기능을 갖기 시작했다.


貢稅串(공세곶)이라는 글자로 보아 그전부터였을 것이다. 1478년(성종 9)부터는 당진 범근내 조창까지 통합하여 역할이 크게 확대되었다. 1523년(중종 18)에는 세곡의 관리를 위해 창고 80칸을 짓고 공진창이라 하였다.


 1631년(인조 9)에 돌로 둘레 380척 높이 5.5척의 창성(倉城)을 쌓았다. 공진창이 가장 활발할 때는 금산을 제외한 충남 전 지역과 평택, 옥천, 청주 등 40개 고을의 세곡이 모였다. 이듬해 봄에 720명의 조군(漕軍)이 움직여 800석씩 싣는 조운선 15척을 띄웠으니 가히 장관이었을 것이다. 과장하면 지금의 부산항이나 인천항처럼 번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조선의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세곡 수집과 운반이 민간상인에게 위탁되기 시작하면서 공진창의 기능이 점차 축소되었다.


 인근 6개 고을에서 3개 고을, 그리고 아산현의 세곡만 수집하게 되었다. 게다가 쌀 대신 돈으로 세금을 받으려는 경향 때문에 1800년대 중반 경에는 기능을 상실하고 방치되었다. 이곳에 성당이 들어섰다. 원래 충청도 내포지역은 천주교가 일찍부터(1785년경) 전파되었고 공세리 일대도 1800년대 초에는 신자들이 생겨났다.


 서울에서 걸매리로 낙향하여 2대에 걸쳐 걸매리·밀두리 일대의 간척사업을 주도한 증 이조참판 박만선(朴萬善, 1721~1782)과 박종학(朴宗鶴, 1751~1836) 부자는 순교자 박의서 형제의 증조부와 조부이다. 1817년 이전에 그 밀양박씨 집안이 근방에서는 천주교를 처음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산지역에서 전교활동을 하던 당진 출신의 하(河)바르바라(여)가 붙잡혀 고초를 겪은 것이 1825년의 일이다.


 이후 점차 확산되며 인주면 공세리·걸매리·밀두리는 물론이고 영인면 성내리, 음봉면 동천리·산정리, 신창면 남성리, 선장면 대흥리, 송악면 거산리(구만이) 등 곳곳에 신자들과 공동체가 생겼다. 그 결과 주로 흥선대원군의 병인박해 시기(1866년~1871)에 수원·서울·공주에서 고문·투옥·참수·교수 등으로 순교하는 등 모두 32명이 순교했다.


 이때 희생된 순교자 중 걸매리 출신의 밀양박씨 집안 중 박의서(사바)·원서(마르코)·익서 삼형제의 유해는 1988년에 인주 냉정리 맹고개에서 공세리 성당 안으로 이장되었다. 이후 2006년에 현재(제21대) 본당 주임 오남한(루카) 신부의 주도로 박인서 등 다섯 분의 유해와 조모니카의 묘표 등을 발굴하여 성당에 옮겨 모셨다. 이듬해(2007년)에 유해가 발굴된 분은 항아리를 이용해 납골식으로 안치하고 병인박해 순교자 28위와 전후의 네 분을 포함하여 32위의 순교자를 모신 순교자 현양탑을 건립하였다.


 ‘신앙의 못자리’ 공세리 성당을 일군 드비즈 신부


 성당을 살펴보자. 1886년 프랑스와의 조약이 체결되면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이미 1880년대부터 천주교가 급속히 확산되어 아산시 지역에도 인주 공세리, 송악 강장리 등 10여 곳에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공소(公所)가 설립되었다.


 내포지역에도 마침내 1890년에 양촌 본당(예산군 고덕면 상궁리)과 간양골 본당(신창현 간양골-현재 예산 간양리)이 설립되었다. 그 중 파스키외(P. Pasquier) 신부가 주임을 맡은 간양골 본당이 아산시 지역 일대도 관할하였는데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인한 타격과 파스키외 신부의 병환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듬해인 1895년 5월에 에밀 드비즈(E. P. Devise, 1871~1933, 한국명 성일론成一論) 신부가 주임신부로 임명되었다. 프랑스 출신인 그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선교를 위해 중국을 거쳐 1894년에 들어왔다. 그는 간양리로 가지 않고 공세리의 민가를 사서 자리를 잡게 된다. 공세리 본당이 시작되는 것이다.


 공세리를 기준으로 하면 그는 첫 주임신부가 되는 것이고 지금까지 그렇게 알려져 왔다. 그러나 최근에 천주교계에서는 공세리 본당이 간양리 본당을 이은 것이기에 파스키외를 공세리 성당의 초대 신부로 보고 드비즈는 2대로 정리했다.


 그는 이듬해에 조선교구의 경리 신부로 서울로 올라가고 후임으로 기낭(Guinand, 한국명 진보안陳普安) 신부가 제3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드비즈 신부는 1897년 5월에 다시 제4대 주임신부로 공세리 본당으로 돌아왔고 1931년에 건강상의 이유로 퇴임할 때까지 모두 36년간 주임신부로 재임하면서 공세리 성당의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는 1895년에 한옥 민가를 성당으로 개조했다.


 1897년에는 공세곶창의 창고 자리를 매입하여 헐고 그 자리에 한옥으로 (구)본당과 (구)사제관을 지었다. 1919년부터 세 번째 성당 건립을 추진하였다. 중국인 기술자 16명과 신자들의 노력 봉사로 만 3년여 뒤인 1922년 10월 8일 현재의 성당 건물과 사제관을 완공했다. 드비즈 신부가 직접 설계한 것으로 추정되는 성당 건물은 고딕 첨탑 양식으로 아담한 규모이며 내부는 삼랑식이다.


 두 줄의 열주(列柱)가 있고 천장과 창문 등은 아치형을 기본으로 하며 유리창은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었다. 완공 당시도 구경거리 소문이 자자했던 이 두 건물은 그 아름다움과 문화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1998년 7월 28일에 문화재(충청남도 지정 ‘기념물 제144호’)로 등록되었다. ‘태극기 휘날리며’ 등 영화와 ‘모래시계’, ‘에덴의 동쪽’ 등의 드라마를 촬영한 장소이기도 하다.


 한편 공세리 성당은 초기에는 아산·천안·공주·진천·안성 지역까지 관할했다. 이때부터 미사에 쓸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포도를 재배하여 이런 인연으로 아산·천안·안성이 포도 주산지가 됐다고 한다. 1897년에 공주본당을 분가시켜 3대 주임이었던 기낭 신부에게 맡겼다.


 1901년 안성본당, 1948년 온양온천동 본당, 1976년에 둔포 본당이 분가하였다. 명실공히 지역의 ‘신앙의 못자리’였던 셈이다. 전교활동 외에도 드비즈 신부는 종기 등 피부병을 많이 앓는 인근 주민들을 위해 서양의학과 한방을 조화시켜 고약을 개발했다.


 ‘성일론 고약’이라고 했던 이 약은 그의 심부름꾼으로 서울에서 따라왔던 이명래(李明來, 요한, 1890~1952)가 비법을 전수받고 상업화에 성공하였으니 당대를 풍미했던 바로 그 전설적인 ‘이명래 고약’이다. 또한 그가 설립한 조성보통학교는 이후 인주초등학교로 이어지며 지역 교육의 기초를 닦기도 했다. 드비즈 신부를 빼고는 공세리 성당을 말할 수 없다.


 그는 귓병으로 퇴임한 후 서울에 머물다가 1932년 말에 몸져누웠다. 치료를 위해 프랑스로 돌아갔으나 1933년 8월 31일 고향에서 아름다운 삶을 마감했다. 작년(2008년) 9월에 구 사제관을 개조하여 박물관을 개관할 때 드비즈 신부의 손자 부부가 자리를 함께 하고 그의 유물 13점을 기증했다. 박물관은 아담하면서도 알찬 맛이 있다. 공세리 성당의 역사와 박해의 아픔을 느끼고 마음을 쓸어내리게 한다.


 관람료는 받지 않는다. 공세리 성당은 1995년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2000년 10월 새 사제관·수녀원, 예수마음 피정의 집, 성체조배실을 완공하고 주변 정비 사업을 마무리했다. 이미 성지로서 순례자들의 발길이 이어진 지 오래다.


 마음공부를 위해 찾는 신자들도 많다. 아주 절묘한 위치에 있고 멋진 나무들도 함께 하는 공세리 성당은 계절과 날씨에 관계없이 언제 가도 좋다. 그리고 갈 때마다 좋은 사람들이 늘 있다.


 


 - 순교자 28위에 대하여


 박물관을 준비하고 자료를 정리하다 공세리에는 32분의 순교자가 계신곳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박물관 짓기 전에는 28위라고 들 알고 있었지요. 다른 자료와 고증을 통하여 32분이라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32위라는 명칭이 분명이 언급되었으면 합니다.


 - 성당은 1998년 7월28일 도지정 문화재로 등록되었습니다.


 - 에밀 드비즈 신부님의 부친이 건축가라는 이야기를 에밀 드비즈 신부님을 도와드리던 공세리 신자(어르신)말씀이 공세리 천주교100년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걸 바탕으로 드비즈 신부님께서 건축에 관해 굉장히 안목이 있으셨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설계및 공사도 신부님 총 지휘하에 건축되었을 것이라 봅니다. 한 예로 신부님께서 직접 작성하신 두 번째 한옥성당의 설계도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 영화촬영및 드라마로 명소가 공세리입니다. 태극기 휘날리며 최근 종료된 드라마 ‘에덴의 동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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