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
맹씨행단
고택
현존하는 살림집으로는 건물의 연혁이나 구조적인 기법이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최초 건립 이후 여러 차례 중수, 보수를 거치며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아산 맹씨행단의 고택의 건립시기는 고려 말로 추정하고 있다.
고택의 중수에 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 『맹씨세적(孟氏世蹟)』 「행단고택중수유래현판게시문(杏壇古宅重修由來懸板揭示文)」에 따르면 고택을 지은 시기가 충숙왕 17년(1330) 2월 17일, 고려말 무민공 최영(崔瑩, 1316~1388)장군이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하지만 충숙왕 17년은 최영 장군의 나이 겨우 15세이기에 그 보다도 그의 부친인 최원직이 이곳에 들어와 집을 지었다고도 한다.
최영 당시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맹사성의 부친인 맹희도가 기거한 이래 후손인 맹사성에게 물려주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최영의 소유에서 맹씨가문으로 넘어간 배경에 대해서는 최영의 손녀딸과 맹사성의 혼인이 깊은 관련이 있는것으로 보인다.
『맹씨세적(孟氏世蹟)』 「행단고택중수유래현판게시문(杏壇古宅重修由來懸板揭示文)」에 의하면 맹사성의 손자 세마공이 세조 때 이시애 난을 당하여 전라도 순천으로 피란하고 막내아들 호군공으로 하여금 집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이때 기와가 무너지는 변괴가 발생해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과 함께 묵서명의 내용을 근거로 할 때 성화(成化) 임인년(壬寅年, 1482)에 호군공이 중수를 하였고, 이때 손좌건향(巽坐乾向)이었던 고택 방향이 계향(癸向)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대청 중도리 받침장혀 묵서명에 '이전의 좌향은 손좌건향이었다. 향을 바꾸어 입주상량하였다. 이후 계향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대청 후측 장도리 묵서에는 정확한 중수내용은 알 수 없으나 임오년(壬午年, 1642) 8월 28일과 갑술년(甲戌年, 1754)에도 고택 중수하였다고 한다.
또, 담장에 사용된 기와 중 제작시기가 새겨져 있는 명문기와가 발견됐는데 이 망새기와에 '건륭29년(乾隆二十九年, 1764)'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이 시기에 개와를 포함한 공사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기록에는 나타나지는 않는다. 1900년대 이후 중수 기록은 「행단고택중수유래현판게시문(杏壇古宅重修由來懸板揭示文)」에 다시 나타난다.
호군공의 13세 지손인 면장 맹용순이 단기 4262년(1929) 기사(己巳) 9월 9일에 중수하였다는 내용과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1964년 중수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09호로 지정된 이후 실시한 1964년의 보수공사는 건물 전면으로 돌출되어있던 부엌 칸을 철거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게 된 공사로 이 때부터 아래쪽에 관리동(별채)을 짓고 후손들이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고택에서는 사람이 기거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로는 1979년 11월 지붕보수 및 대문채 중수, 1988년 8월 지붕 보수 공사, 같은 해 11월에는 벽체 보수 공사, 1995년 대문채 보수 공사, 1997년 지붕 보수 공사가 이어졌다.
고택은 정면 4칸, 측면 3칸이나 정면 가운데 2칸이 반칸씩 안으로 들어간 '工'자형 평면을 구성하고 있으며 맞배지붕 구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