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역사

500년 역사의 살아있는 민속박물관 아산외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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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역사

1. 고려 및 조선 전기 이전

선사 ~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외암리(外岩里) 역사는 현재로서는 확정된 것이 거의 없다. 조선시대 시흥역(時興驛)이 있던 현 역촌리(驛村里)와 외암리는 1.5km 정도 거리이며, 온양에서 남쪽의 시흥역까지 오는 길목의 동쪽에 외암리가 위치해 있다. 전설에 ‘외암리’라는 지명이 시흥역에서 기르는 말을 먹이는 오양골이 ‘외암’으로 바뀌었다고 전해질 만큼 외암리의 형성과 발전은 역원의 변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흥역의 전신(前身)인 고려 때의 이흥역(理興驛)은 당시에 이미 중요한 역로였으나, 그 위치가 명확히 고증되지는 않았다. 고려 때의 이흥역 자리가 조선시대의 시흥역인지, 이름이 바뀌면서 자리가 이동된 것인지 현재로써는 확인이 어렵다. 조선시대의 기록도 전·후기 자료에 따라 다른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시흥역이 남쪽 8리 지점이라 하였지만,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남쪽 10리라 하여 그 지점이 이동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온양군의 관아가 이동하지 않았으므로 두 기록을 비교하면 조선 초의 시흥역과 조선후기의 시흥역 간에 2리, 약 800m의 거리 차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시흥역의 위치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은 17세기 말의 실학자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 ~ 1673)의 『반계수록(磻溪隨錄)』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전기 온양의 성씨에 관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토성(土姓)인 정(鄭) · 이(李) · 방(方) · 강(康) 씨와 촌성(村姓)인 윤(尹) 씨가 확인된다. 또한 외암마을의 구전에 의하면 약 500여년 전에 선주성씨로 강(姜) 씨와 목(睦) 씨가 살았다고 하나 지금까지 그 유서를 찾기 힘들며 『외암유고(巍巖遺稿)』에는 예안이씨가 세거하기 전 파평윤씨와 의령남씨, 평산심씨가 마을에 거주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역시 각 성씨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다. 다만 강씨와 목씨의 뒤를 이어 마을에 정착한 평택진씨 진한평(陣漢平)과 그의 사위 예안이씨 이사종(李嗣宗)이 이거한 사실이 기록으로 전해진다.

2. 예안이씨의 입향과 번성

진한평은 평택진씨로 외암리에 정착한 경위는 소상하지 않지만 대단한 경제력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진한평에게는 딸만 셋이 있었는데 예안이씨 이사종은 그중 장녀와 혼인하였다. 이사종은 명종 1년(1546)에 부친상을 계기로 벼슬을 그만두고 처가인 외암마을에 정착하였고, 이때 아버지 이연(李埏, ? ~ 1546)의 묘소를 인근 송악 사기소리에 정하였다.

진한평의 묘소에 대한 외손봉사는 최근까지 이어졌으며, 이를 위한 제답(祭沓) 12마지기가 운영되어왔다. 이는 조선시대 양반가 외손봉사의 전형으로, 기록화사업 학술조사에서 확인된 전승유물 중에는 관련 고문서가 발굴되기도 하여 근대에 이르기까지 진한평의 외손봉사가 꾸준히 이어져 왔음을 알려준다.

외암리의 진한평 관련 유적으로는 묘소만이 전해지는데, 묘소는 외암마을 남단 약 300m 지점으로 속칭 ‘골말[谷村]’ 뒤편 구릉에 위치한다. 골말에는 1950년대 까지만 하여도 몇 가구가 살았었고, 주민들은 마을에 있던 연못 부근을 진한평의 집터였을 것이라고 지목한다. 묘비는 1973년 세워졌으며, 상석은 1986년에 건립되었다. 묘비 전면에는 ‘참봉평택진공한평지묘(參奉平澤陣公漢平之墓)’, ‘배유인청주한씨부(配孺人淸州韓氏祔)’가 나란히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사위 이사종과 그 손자 대까지의 이름과 관력(官歷)을 간단하게 새기었다.

한편 이사종은 처가에 낙향한 후 자신의 집 주위로 경관이 좋은 곳을 정하여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지어 유유자적하고자 했다. 이 정자가 바로 열승정으로 열승정이 있었던 골말을 마을주민들은 지금도 ‘열승쟁이’라고 부르고 있다. 열승정은 조선후기 읍지와 고지도에도 표기되어 있을 만큼 널리 알려졌다.

특히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 ~ 1584)의 문인이자 조선시대 8문장가로 손꼽혔던 최립(崔岦, 1539 ~ 1612)이 쓴 기(記)가 전하는데 최립은 이사종의 사위이다. 통천최씨로 이사종의 막내딸과 혼인하였으며 명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참판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에는 외교문서 작성에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여 명나라 학자들로부터 격찬을 받은 바 있다. 차천로의 시, 한호의 글씨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도 일컬어진다.

건재고택에 걸린 「열승정기(閱勝亭記)」에는 열승정이 자리한 골말의 모습과 장인 이사종의 낙향 배경,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지은 ‘열승(閱勝)’에 대한 견해가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열승정기」에는 이사종과 사위 최립이 정자의 명칭에 대해 나눈 견해가 서술되어 있는데, 이로 미뤄보아 이사종 역시 상당한 학식을 갖춘 인물로 생각된다.

현재 열승쟁이에는 마을이 없으나, 조선후기 『호구총수(戶口總數)』와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 중의 「온양군읍지(溫陽郡邑誌)」에는 외암리와 함께 ‘열승정리’가 기술되어 있다. 「온양군읍지」의 남하면 조에는 마을 호구가 적혀있는데, 열승정리가 5호(남 29, 여 53), 외암리가 22호(남 37, 여 69)이다. 읍지에는 궁평(28호)과 상역리(61호), 하역리(77호)로 기록되어 주변 마을의 인구와 규모를 비교하여 볼 수 있다.

이간의 『외암유고』 중 「외암기(巍巖記)」에는 참봉공(이사종의 부 이연)의 묘를 송악 외록에 정하고, 자신(이사종)의 묘소도 송악산 중에 정하였으며, 외암에 집[別業]을 짓고, 열승정을 건립하였음을 분명하게 적고 있다. 입향조 이사종의 묘역은 아산시 송악면 유곡리 62번지에 위치하는데 거산초등학교 북쪽 약 450m 지점의 암벽에는 ‘예안이씨세장지(禮安李氏世葬地)’라는 세장비가 있으며(국도 확포장 공사로 일부 훼손됨), 묘역을 관리하기 위한 묘막(墓幕)이 남아 있다.

예안이씨는 전의이씨에서 갈라져 이익(李翊)을 시조로 삼고 있다. 후손들은 시조로부터 5세인 이시(李恃)에 이르러 보은파(報恩派), 김포파(金浦派), 동고파(東皐派), 안동파(安東派), 홍주파(洪州派), 수온파(水溫派)로 나뉘는데 외암리의 예안이씨는 ‘수온파’로 수원과 온양에 거주하는 가계라는 의미이다. 이시는 이수간(李粹幹)과 이성간(李成幹)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수간은 손자 대에 이르러 후사가 이어지지 못했다. 이에 따라 예안이씨 수온파의 가계는 2자인 이성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어 이성간의 장자 이장(李場)도 영조 40년(1764) 발간된 「예안이씨족보」에 의하면 딸만 셋을 두어 후사가 없었기에 가계는 다시 차자인 이연(李埏, ? ~ 1546)에게로 이어졌다.

이연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 이사권(李嗣權)의 후손은 손자 대 이후 끊어졌으므로 예안이씨의 가계는 이연의 차남인 이사종에게 이어졌다. 이사종은 명종 1년(1546)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관직을 그만둔 뒤 외암리로의 낙향을 결심하고 처가 인근 사기소리에 아버지의 묘소를 마련하였다. 이 가계가 바로 예안이씨 ‘온양파’이며 이러한 입향과정에서 선주성씨로 이 일대에 상당한 재력을 갖추었던 장인 참봉 진한평의 도움이 있었을 것임을 자연스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진한평의 사위로 외암마을에 입향한 이사종에게는 이윤(李崙), 이급(李岌), 이단(李耑, 1554 ~ 1623)의 세 아들이 있었는데 흔히 참의공파, 급파, 장악원정공파로 기록하기도 하고 후손들은 보통 윤파, 급파, 단파로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입향조 이사종의 가계는 종계(宗系)인 ‘이사종-이윤-이광문(李光門)’으로 이어지는 윤파(崙派)와 ‘이사종-이급-이영문(李榮門)’으로 이어지는 급파(岌派)가 모두 후대에 이단의 후손인 단파(耑派)에서 입후하여 가계를 이어갔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외암마을 예안이씨 온양파는 이서종의 3자 이단의 후손들로 계승되었으므로 후손들은 3파의 구분을 거의 두고 있지 않다.

입향조 이사종이 처향(妻鄕) 외암마을에 정착한 것은 당시의 풍속으로 볼 때 특기할 만한 사실은 아니다. 나아가 예안이씨는 외암리에서의 안정적인 정착 이후 역시 혼인관계로 맺은 파평윤씨, 의령남씨, 평산신씨의 외암마을 정착의 유서가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간이 경종 3년(1723)에 작성한 「외암기」에 의하면 이들 3성씨는 모두 입향조 이사종의 손자 대에 혼인한 성씨로 외암마을을 처향으로 정착하여 ‘모두 대대로 높은 벼슬자리를 지낸 집안으로 이 골짜기에서 서로 이웃하며 살고 있는데 모두 이씨의 외손’이며 또한 처가 예안이씨들의 지원으로 성장한 성씨이기도 하였다. 물론 입향 초기 예안이씨들의 향촌사회에서의 위상 강화에 이들이 큰 힘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사종은 모두 3남 1녀를 두었다. 그 중 장자 이륜은 2남 4녀를 두었는데 사위가 안만설(安蔓設), 윤근(尹根, 1574 ~ ?), 이수검(李守儉), 윤기형(尹起衡)이다. 차자 이급의 사위는 한후기(韓後琦), 3자인 이단의 두 사위가 바로 남발(南撥, 1561 ~ 1646)과 신경원(申景瑗, 1581 ~ 1641)이었다.

이사종의 장자 이륜의 사위인 윤근은 파평윤씨로 일재(一齋) 이항(李恒, 1499 ~ 1576)의 문인이며 광해군(光海君, 1575 ~ 1641, 재위 1608 ~ 1623) 때 지평을 지냈다. 이 집안과의 교류는 계속 이어져 윤근의 현손 윤혼(尹焜, 1676 ~ 1725)은 외암 이간과 함께 권상하(權尙夏, 1641 ~ 1721)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지척에 거주하면서 막역하게 지냈다. 또한 숙종 33년(1707) 이간과 함께 관선재를 건립하여 후학을 양성한 것은 외암리의 중요한 역사 중 하나이다.

3자 이단의 사위 중 한 명인 남발은 남구만(南九萬, 1629 ~ 1711)이 지은 그의 묘표에 의하면,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 ~ 1598)의 제자로 1610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이첨(李爾瞻, 1560 ~ 1623) 등으로부터 추포(秋浦) 황신(黃愼, 1560 ~1617)을 변호하다가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으며 삼척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벼슬을 그만둔 후 고향에 은거하였는데 86세에 온양 설애산(雪厓山) 아래 외암동(巍巖洞)의 집에서 별세하여 태안 금굴산(金堀山) 선영 아래에 장례하였다고 한다. 남발 역시 당시부터 외암마을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 다른 사위인 신경원은 선조 38년(1605) 무과에 급제하여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난 때 황주 신교(薪橋)에서 패한 관군을 모아 안현(鞍峴)에서 반군을 대파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에 평녕군(平寧君)으로 봉해졌다. 병자호란(1636) 때에는 평안, 황해, 함경, 강원 4도의 부원수(副元帥)로 맹산 철옹성을 지키다 포로가 되자 단식으로 항거하였다. 이듬해 강화가 성립되어 석방되었으나 패전을 이유로 멀리 귀양보내졌다. 그러나 1638년에 풀려나 총융사 겸 포도대장을 지냈다. 「외암유고」에 따르면 자녀가 없어 큰형인 충청병사 신경진(申景珍)의 아들 신휘(申暉)를 양자로 들였다.

입향조 이사종 이후 예안이씨가 향촌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위상을 마련한 것은 이사종의 증손으로 무과에 급제한 이박(李璞, 1610 ~ 1678) 이후로 보아야 할 듯하다. 예안이씨의 외암리 입향 이후 처음으로 무과에 입격한 이박은 이사종의 손자 이진문(李振文, 1581 ~ 1624)의 아들로 벼슬이 현종 7년(1666) 충청수사에 이르렀다. 그의 부인은 백호(白湖) 윤휴(尹鑴, 1617 ~ 1680)의 딸이다.

이박은 모두 6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외암유고』에 수록된 「왕고절도부군행장(王考節度府君行狀)」과 1898년 「세보(世譜)」에 의하면, 장장 이태형(李泰亨, 1632 ~ 1717)은 숙종 10년(1684) 생원시에 입격하여 부호군에 이르렀고, 차자 이태장(李泰長, 1646 ~ 1707)은 무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부사(府使)를 역임하였으며, 3자 이태정(李泰貞, 1649 ~ 1697) 또한 무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고, 서자 이태관(李泰觀, 1674 ~ 1734)과 이태하(李泰夏, 1677 ~ 1736) 또한 무과에 급제한 것으로 되어 있다. 더욱이 차자 이태장은 입향조 이사종의 종계(宗系)인 이광문의 가계에 입후하였으므로, 이 가계의 위상은 더욱 굳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외암마을 예안이씨를 대표하는 대학자 이간은 바로 이박의 손자이다.

외암마을의 예안이씨는 이간(李柬, 1677 ~ 1727)이라는 대학자를 배출하고, 그 후손들이 다수 과거에 급제함으로써 입지를 한층 강화하였다. 이간 이후 예안이씨는 사마시 합격자를 꾸준히 배출하다가 고종 대에 문과합격자를 2명 배출하였다. 19세기 이후에는 후손들이 번성하고 관직에 진출하였는데, 지금 마을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고택은 이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택호에 당시 집주인의 벼슬을 붙인 것이 지금까지 불리고 있어 당대 예안이씨 문중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영조 2년(1762) 편찬된 「종계서(宗契序)」는 외암마을 예안이씨들의 위상과 18세기 초중반이 1차 전성기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이간은 종계서에서 “세대가 내려오는 동안 근근이 벼슬을 이어오다가, 종인(宗人)이 드물게 되고 집안의 힘이 미약하게 되어 무덤에 올리는 비석을 세우지 못하고 시제를 거행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고 당시 가계의 정황을 술회한 후 비로소 자신과 집안의 여러 사람들이 주도하여 선대의 표석(表石)과 상석(床石)을 세우는 등 선영을 정비하였음을 기록하였다.

3. 추사 김정희의 처가

외암마을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 ~ 1856)의 처가로도 유명하다. 김정희는 첫 부인과 일찍 사별하고 22세에 예안이씨 이병현(李秉鉉)의 딸과 재혼하였다. 이병현은 이간의 증손이다. 김정희는 부인 예안이씨와의 금슬이 남달라 부인에게 보낸 한글편지와 부인의 사망을 애도하는 애서문(哀逝文)을 남겼다.

현재 김정희의 한글편지는 40통이 전하는데, 그 중 부인 사후 며느리에게 보낸 2통을 제외하면 38통이 부인 예안이씨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편지의 내용은 아들 손자의 탄생, 혼사와 회갑, 가족의 죽음이나 제사 등 종손으로서 본가와 처가 집안 대소사를 일일이 챙기고 있는가 하면 아내의 소식을 동동거리며 기다리는 조급함, 의복 문제, 노환과 질병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대목도 등장한다. 평양 기생과의 염문을 해명하는 글, 까다로운 입맛 때문에 서울에서 제주까지 먹을거리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글, 며느리에게 제사지내는 방법을 가르치도록 당부하는 내용도 들어있다.

애서문에서 그는 “나는 행양이 앞에 있고 영해가 뒤에 따를 적에도 일찍이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는데 지금 부인의 상을 당해서는 놀라고 울렁거리고 얼이 빠지고 혼이 달아나서 아무리 마음을 붙들어 매지도 길이 없으니 이는 어인 까닭이지요. …… 삼십 년 동안 그 효와 덕은 종당(宗黨)이 일컬었을 뿐만 아니라 붕구(朋舊)와 외인(外人)들까지도 다 느껴 칭송하지 않는 자 없었고. 그렇지만 이는 인동상 당연한 일이라 하여 부인은 즐겨 받고자 하지 않았던 것이었소. 그러나 나 자신은 잊을 수 있겠소.…… 지금 부인은 끝내 죽고 말았으니 먼저 죽어가는 것이 무엇이 유쾌하고 만족스러워서 나로 하여금 두 눈만 뻔히 뜨고 홀로 살게 한단 말이오. 푸른 바다와 같이 긴 하늘과 같이 나의 한은 다함이 없을 따름이외다”라고, 부인을 먼저 보내는 남편의 절절한 심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4. 외암마을의 근현대사

퇴암(退庵) 이성렬(李聖烈, 1865 ~ 1913)은 이상훈(李相勳)의 아들이며, 이상유(李相逌)에게 입양되었다. 1888년 성균관에서 실시된 칠석제(七夕製)에 합격하여 같은 해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홍문관 응교, 대사성을 역입하였고, 외직으로는 1895년 진주부 관찰사를 비롯하여 경상북도와 전라남도의 관찰사, 경상남도의 순찰사를 지낸 후 의정부 참찬(參贊)에 올랐다.

한편 이성렬은 면암 최익현과도 오래 교류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면암선생문집』 부록 제3권 「연보」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또 1905년에 궁내부특진관에 재임 시 왕명으로 복제(服制)를 개정하게 되자, 최익현과 함께 이를 반대하교 전통적인 복제를 유지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해 결국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버리고 여주에 근거하였다.

『면암집』에는 이로부터 3년 후인 1906년에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하고 충청도의 이성렬, 전우 등에게 서찰을 보내 함께 도모할 것을 촉구한 기록이 있다. 당시 이성렬은 민종식(閔宗植, 1861 ~ 1917), 이시영(李始榮, 1869 ~ 1953) 등과 함께 의병을 모으기로 하고 군자금을 전달하였다. 외암마을에는 이성렬이 가옥[교수댁]을 비롯한 모든 가산을 팔아 군자금으로 전달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한편 당시 이성렬의 의병활동에 함께했던 수당 이남규(修堂 李南珪, 1855 ~ 1907)와의 사연이 기록으로 전한다. 이남규는 한산이씨로 예산 출신이며,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1895년 영흥부사(永興府使) 시절에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를 보고는 일본에 대한 복수를 눈물로 상소하였다. 그는 1907년 의병장 민종식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혐의로 공주감옥에 투옥되었다. 이후 일본군에게 연행되어 온양으로 끌려가던 길에 아들 이충구(李忠求)와 함께 피살되었는데(1907. 8. 19.), 이때 이남규가 피살된 곳이 바로 외암마을 앞이었다. 황현(黃玹, 1855 ~ 1910)이 한말의 비사(秘史)를 엮어 기술한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격변의 시기 이남규와 이성렬에 관한 당시의 이러한 사연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이성렬 역시 일본군에게 의병의 명부를 압수당하면서 많은 의병이 붙잡히자, 자신의 불찰을 후회하고 비통해하며 단식으로 자결하였다. 이성렬의 이와 같은 행적이 인정되어 1977년 대한민국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퇴호 이정렬(退湖 李貞烈, 1868 ~ 1950)은 충북 보은 외속리면에서 예안이씨 보은파 이철인(李哲仁)과 영산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0세 때 외암마을의 이상규(李相逵, 1863 ~ 1936)에게 출계하기 전까지는 몹시 궁핍한 살림으로 형과 함께 밭을 갈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에 심취하여 밭을 갈다 쉬는 동안에도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이정렬의 할머니 가평이씨는 명성황후의 이모였으며, 명성황후가 평소 이정렬의 진중한 성품을 신임하여, 훗날 임금을 보필할 만한 인재라며 각별히 총애하였다고 한다.

이정렬이 17세 때인 1884년에는 갑신정변이 일어나는 등 격변의 시기가 도래하였다. 당시 이정렬은 혼란한 상황과 위험을 무릅쓰고 내전에 들어가 사건의 전말을 명성황후에게 고할 정도로 당당한 성품이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그를 ‘원대지기(遠大之器)’라 칭송하였다. 그러나 결국 일본의 압력은 날로 거세져 갔고, 강제로 통상조약을 요구하고 사법권을 이양할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정렬은 통분하고는 외부대신에게 책임을 묻는 상소를 올렸으나, 그 뜻은 이미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이후에도 고종이 여러 차례 돌아올 것을 권하면서 하사품과 전(錢)을 내리기도 하였는데, 이정렬은 궁핍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돌려보냈다.

이 같은 연유로 고종이 이정렬에게 ‘퇴호거사(退湖居士)’라 호를 내렸고, 당시 영왕이 9세 때 써서 내려줬다는 ‘일심사군(一心事君)’과 ‘퇴호거사’의 현판이 집안에 전한다. 결국 고종은 이정렬의 고집을 꺽지 못할 것이라 단념하고, 도리어 마을에 집을 지어주면 뜯어버리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고종은 이 집을 창덕궁의 낙선재를 본 따 짓게 했는데, 그것이 현재의 참판댁(국가민속문화재 제195호)이다.

이정렬은 외암리에 머무는 동안 종중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당시 예안이씨 온양파는 종중원 중 학식과 덕망을 갖춘 이를 ‘장로(長老)’라 칭하고 집안의 어른으로 모셨다. 이정렬은 해방 이후까지의 예안이씨의 장로로 종가의 마련, 사당의 신축, 그리고 이간의 신도비 건립을 주도하였다.

이정렬의 『퇴호유고(退湖遺稿)』 「연보(年譜)」에, ‘문정공파는 1922년 종손이 궁핍하게 살고 불천위 사당도 세우지 못하자 제종의 찬조금을 모아 종가와 사당을 마련해 주었으며, 1924년에 이간의 신도비를 건립하였다’고 하여 당시의 정황을 일부나마 파악할 수 있다. 신도비 건립시 유사는 후손 이용헌, 이용빈, 이용후, 이명렬, 이욱렬 등이다.

퇴호 이정렬의 행적 중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1902년 11월에 조직한 칠은계(七隱契)이다. 칠은계는 주로 시회(詩會)를 많이 벌이며 당시의 세태를 논하곤 하였는데, 참여한 인물은 용인이씨 이주상(李冑相), 온양 읍내의 정인호(鄭仁好), 역촌리의 조희동(趙熙東), 마곡리의 안숙(安淑), 용인이씨 이진상(李晉相), 파평윤씨 윤주영이었다. 이들의 주된 활동은 남아있는 자료가 없어 구체적으로 밝히긴 어려우나, 시회를 명분으로 만나 실상은 암암리에 충청지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악리 인근 유곡리 봉수산자락의 속칭 ‘적지미’에는 아직도 이들이 모였던 건물이 남아 있어, 위패를 봉안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고종 42년(1905)에는 이정렬의 고(考) 통덕랑 이상규에게 내부협판을 추증하고, 조고(祖考) 영유현령 이원집에게는 비서감승을 추증하고, 증조고(曾祖考) 통덕랑 이명현에게 예시구언 좌장례를 추증하였는데, 이상은 전 시종원 부경 이정렬의 고, 조고, 증조고에게 법전에 따라 행한 것이다. 현재 ‘참판댁’은 퇴호 이정렬의 거처로 교지(敎旨), 칙명(勅命), 명성황후어찰(明成皇后御札), 일심사군 및 퇴호거사 현판, 퇴호유고 등 600여 점에 이르는 유품들(고문서, 전적, 관복류, 생활용구, 민속유물 등)이 소장되어 오다가, 대부분은 온양민속박물관에 기탁되어 있다.

5. 외암마을의 향촌교육과 화산의숙

외암 이간과 윤혼은 1707년 강당리에 외암정사를 지어 후학을 가르쳤으며, 구한말 참판을 지낸 퇴호 이정렬 또한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아 인근 사람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비교적 높았다. 일제강점기에는 마을 안 외암 이간 선생의 종가에 송남보통학교가 설립되어 비교적 이른 시기에 근대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보통학교는 1924년 인근 역촌리에 학교를 신축하면서 이전하였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마을사람들은 이용정(李用廷, 1876 ~ 1913)이 세운 화산의숙(華山義塾)에서 한학을 배우기도 했다. 화산의숙은 최초 설라리 서정립의 사랑방에서 시작하였다가, 이후 외암리 이우선의 사랑방으로 옮긴 후 다시 이용정의 사랑방으로 옮겼다.

화산의숙은 20여 년간 마을사람들의 기초교육을 담당해 왔으며, 거쳐 간 학생만 400여 명이 넘었다. 한편 화산의숙과 인연을 맺은 제자들은 1950년대 말 ‘화산의숙계’를 조직하였다. 화산의숙계는 이용신이 주도하여 조직되었고, 처음 계를 설립할 때는 13명 정도가 형평껏 쌀 1 ~ 2말을 내었다고 한다. 이러한 경비가 모여 수곡리에 땅 5마지기(약 3,306㎡)를 샀는데, 이때 장만한 논은 마을입구에 세워진 백산 이용정의 송덕비 건립에 사용되었다. 또한 졸업생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것으로 보이는 화산의숙 「동문계문서」가 새롭게 확인되었는데, 이는 졸업생과 학생으로 계회에 가입한 자로 구성된 조직이었고, 제5조에 보면 애경사부조, 사은, 기타 기금조성 등의 사업을 목적으로 결성된 것이었다. 구체적이고 상세한 조직으로 동문계가 조직,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는 총 30조의 규약이 수록되어 있다.

6. 오늘의 외암마을

외암마을은 예안이씨의 종족마을로서 활발한 문중활동과 엄정한 조상숭배의례 준수 그리고 가계 계승의식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마을이다. 예전부터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의 주역 중 한명인 외암 이간 선생의 마을로 잘 알려져 왔고, 근래에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렸던‘추사 한글 편지’ 전(2004. 5. 25. ~ 6. 27.)을 통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 ~ 1856)가 첫 부인과 사별하고 22살에 재혼한 예안이씨(외암 이간의 현손녀)에게 보내는 애틋한 편지가 공개되어 추사 김정희의 처가 마을로도 유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외암마을은 방문하는 이들에게 예안이씨 종족마을로서 보다는 전통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민속마을로서 더 잘 알려져 있다. 물론 외암마을이 민속마을로서 가지는 문화적 가치는 과거 예안이씨의 종족마을에 그 원류를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외암마을은 지난 20세기 후반 이래 마을을 방문하는 많은 이들에게 다양한 축제와 더불어 여러 가지 체험행사를 통해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민속마을로서의 이미지를 강하게 심어왔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이미지는 외암마을이 향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민속마을로서 그 위상을 지속시키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