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500년 역사의 살아있는 민속박물관 아산외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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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건재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233호)

건재고택(建齋古宅)은 마을의 중심부에 위치한 가옥으로 영암군수를 지낸 이상익(李相翼, 1848 ~ 1897)이 고종 6년(1896)에 지금의 모습으로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이상익은 예안이씨 18세손으로, 외암 이간의 5대손이다. 건재고택이 자리 잡은 터는 외암 이간이 태어난 곳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건재(建齋)’라는 택호는 아들 이욱렬(李郁烈, 1874 ~ 1960)의 호에서 유래한 것이다.

건재고택은 설화산을 진산(鎭山)으로 하는 마을의 산세에 따라 서북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건물의 배치는 문간채, 사랑채, 안채를 주축으로 하여 , 안채의 오른편에 나무광, 왼편에 곳간채, 안채 뒤편 오른쪽에는 가묘(家廟)를 배치하였다. 안채와 사랑채는 ㄱ자형 집으로 마주하여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 앞 넓은 마당에는 연못과 정자, 소나무와 향나무, 단풍나무 등으로 정원을 꾸몄다. 설화산에서 흘러온 수로가 담장 밑에 설치된 입수구(入水口)를 따라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낙차를 가진 작은 폭포가 되어 연못으로 떨어진다. 수로 양쪽 가장자리는 자연석을 놓아두어 수심과 함께 계류(溪流)의 아름다운 운치를 느끼게 한다. 이 정원은 건재고택 건축 당시에 계획된 것이 이상익의 손자 이용기(李用琦, 1896 ~ 1980)에 의해 더욱 정교하게 꾸며진 것이다.

원래 건재고택의 나무광 후측에는 별당건물이 있었으나 후대(이욱렬 대)에 연못으로 변형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 관련하여 구전으로 이욱렬의 처 결성구씨(1873 ~ 1953)가 뒤뜰 별당자리에 용이 나오는 꿈을 꾸고 4형제 이용기, 이용선(李用善), 이용찬(李用讚), 이용근(李用根)을 낳았고 이 무렵 별당을 헐고 연못을 조성하였다고 전한다. 사랑채 앞마당에 있는 2동의 정자는 당초 초가였던 것을 기와지붕으로 개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옥의 주위에는 돌담을 두르고 돌담 밖(곳간채 후측)에는 초가로 된 가랍집을 두었다.

건재고택에는 도자기, 낙관, 서화, 현판, 생활용구 등 대대로 물려오는 유물 300여 점이 보관되어 있다. 특히 예안이씨 입향조 이사종이 골말에 세웠던 열승정의 기문(記文)과 순조 11년(1811) 외암 이간의 증직교지는 이 집의 터가 예안이씨의 최초 입향지라는 근거가 되고 있다. 이처럼 건재고택은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건축으로, 건물의 배치와 규모, 기법으로 보아 외암마을을 대표할 만한 가옥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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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판댁(국가민속문화재 제195호)

외암마을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참판댁(參判宅)은 큰집과 작은집이 담장을 사이에 두고 이웃해 있다. 이 중 큰집은 19세기 후반 규장각의 직학사(直學士)와 참판(參判)을 지낸 퇴호 이정렬(退湖 李貞烈, 1868 ~ 1950)이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아 지었다고 한다.

아래 참판댁은 집이 아래에 있어 편의상 붙은 택호이다. 이정렬은 할머니 한산이씨가 명성황후의 이모였기 때문에 명성황후로부터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참판댁에는 고종이 이정렬에게 하사한 ‘퇴호거사(退湖居士)’라는 사호(賜號)를 영왕이 9세때 쓴 현판이 남아있다.

두 집은 각각 행랑과 사랑채, 안채, 곳간 및 가묘(사당)를 갖추고 있으며, 큰집의 사당과 작은집의 대문채, 사당은 20세기 초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 집은 돌담을 이용하여 공간을 구획하고 있으며, 큰 집의 대문 앞으로 돌담을 쌓아 독특한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집안의 살림살이가 잘 보존되어 옛 생활방식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전통가옥이다.

동남향으로 자리잡은 큰집은 솟을대문을 낸 ‘ㅡ’자형 문간채 안에 ‘ㄴ’자형의 사랑채(5칸)와 곳간채가 ‘ㄱ’자형의 안채(10칸)와 안마당을 감싸면서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는 작은 사랑방, 분합마루, 큰 사랑방, 뒤편의 부엌으로 구성된다. 동남향으로 자리잡은 문간채는 사랑채가 정면으로 보이지 않도록 약간 서쪽으로 틀어져 있다. 또 중문간은 사랑채 동쪽 옆면에 두어 안마당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꺾어 들어가게 되어 있다. 안채의 서북쪽 뒤편에는 사당이 자리 잡고 있으며 대문 앞으로 돌담을 쌓아서 깊이 있는 진입로를 마련하고 있다.

큰집 바로 아래에 있는 작은집은 서남향을 하고 있으며, 큰집과 비슷하게 튼 ‘ㅁ’자의 배치를 하고 그 앞에 대문간채가 ‘ㅡ’자형으로 있다. 안채(6칸)와 사랑채(7칸)의 평면구성은 큰집과 비슷하며, 사당은 안채의 동북쪽 뒤편에 있다. 대문간채는 초가지붕으로 평대문을 냈으며, 큰집과 달리 사랑채를 향하도록 동쪽으로 틀어서 배치하였다.

사랑방 앞에 대청 양쪽 전체에 분합문을 둔 고방을 설치하여 과방(果房), 툇마루 등 여러 용도로 이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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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댁

마을의 동북쪽에 위치한 송화댁(松禾宅)은 송화군수(松禾郡守)를 지낸 이장현(李章鉉, 1779 ~ 1841)으로 인해 붙여진 택호이다. 이장현은 입향조 이사종의 9세손으로 호는 초은(樵隱)이며, 음직(蔭職)으로 벼슬에 나아가 송화군수를 지냈다.

송화댁은 앞쪽에 ‘ㅡ’자형의 사랑채를 두고 뒤쪽에 ‘ㄱ’자형의 안채를 두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동편에 중문간을 두어 전체적으로는 튼 ‘ㅁ’자 배치이다. 이 집의 사랑마당은 마을의 다른 가옥들 보다 넓은 편이지만 건물은 그리 크지 않다.

넓은 사랑마당에는 정원을 꾸몄는데, 앞뒤로 노송이 우거진 낮은 둔덕을 이용하여 자연미가 있는 정원이다. 동측담 밑으로 들어온 수로는 똑바로 흐르다가 사랑채 앞에서 곡류(曲流)로 변한다. 이 곡류는 사랑채의 서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서측 담으로 빠져나간다. 물 길 양쪽에는 낮은 동산과 자연석을 적절히 배치하여 물길의 방향을 바꾸고 흘러내림의 낙차고를 조절함으로써 물 흐르는 소리를 즐길 수 있다.

돌과 흙을 이용한 가산(假山)은 축소된 자연의 형태라 할 수 있으며, 의도적으로 배치한 수석은 음(陰)과 양(陽)을 상징하고 있다. 이처럼 인위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정원의 배석(配石) 기법과 계류(溪流) 계획은 자연현상을 이해하고 그 이치를 파악한 식견 있는 사람의 조경예술이라 평가받고 있다. 또한 정원 주변의 수목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종을 심어 친근감을 더하고 있다.

한편, 전언에 의하면 송화댁의 본채 바로 옆에는 이병현(李秉鉉, 1754 ~ 1794)의 둘째 딸이자 추사 김정희의 부인인 예안이씨가 거주하였다고 전해지는 고택이 있었다고 한다.

신창댁(병사댁)

이 집은 홍경래의 난을 진압한 이용현(1783 ~ 1865)으로부터 유래한다. 이용현은 입향조 이사종의 9세손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총관, 경연특진관 등을 지냈다. 이용현의 6세손인 이창선까지 현재의 신창댁에 살았으므로 전에는 이 집을 병사댁이라 불렀다.

신창댁은 병사댁이라 불리던 택호가 바뀐 것이다. 신창댁이라는 택호는 이사종의 12세손인 이세열의 처 보성임씨의 친정이 신창인데서 기인한다. 사랑채가 따로 없는 이 집은 ‘二’자형으로 가운데 3칸의 대청마루를 두고 건넌방 끝 방을 사랑방으로 사용하여 별도의 사랑채를 두지 않았다.

교수댁

교수댁은 마을 중앙부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용구(李用龜, 1854 ~ ?)가 경학(經學)으로 천거(薦擧)되어 성균관 교수를 지냈다고 하여 붙은 택호이다. 이용구의 생부는 이장렬이며, 백부인 이정렬에게 출계하였다. 이용구의 아들 이백선의 글씨가 반계와 용추에 있다.

교수댁 역시 외암마을 고택의 특징인 소계류(小溪流)를 이용한 연못과 수석으로 잘 가꾸어진 정원을 마련하고 돌담 밖에는 ‘삼신상사상’을 상징한다 할 수 있는 작은 방지를 두었다. 바깥에는 초가지붕으로 된 디딜방아가 남겨졌고 높은 솟을대문의 행랑채가 있다.

참봉댁

참봉댁은 이중열(李重烈, 1859 ~ 1891)과 이용후(李用厚, 1886 ~ 1955) 부자가 참봉을 지낸 연유로 얻은 택호이다. 참봉댁은 마을에서 보기 드물게 ‘一’자형의 안채와 사랑채가 나란히 2열로 평행 배열된 ‘二’자형이다. 약 6m의 거리를 두고 안채와 사랑채를 배치하였는데 정면 길이는 같고 측면의 폭은 서로 다르다.

감찰댁

택호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옛 주인의 관직에서 따온 것으로 추측된다. 안채의 중앙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6칸 대청을 중심으로 동측에 방을 서측에는 마루방, 아래쪽으로 안방이 있으며 이어서 부엌과 작은방을 배치하였다.

안채의 동측 뒤편에 가묘가 있는데 정면 1칸, 측면 1칸반 홑처마 맞배지붕이며 측면이 긴 형태로 되어 있다. 안채의 동측에는 대나무 숲이 있으며 그 앞으로 정원과 정자가 있고 작은 연못에 조성되어 있다.

기타 택호

이 외에도 옥천군수를 지낸 이장열과 고양군수를 지낸 이상덕에 의해 붙어진 택호인 옥천댁, 고양댁도 있으며, 시집 온 부인의 친정을 따라 조실댁, 이룡댁, 연산댁, 전의댁, 송점댁, 왕진댁 등이 있다.

외암정사(관선재, 외암서원)와 강당사

외암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을 거슬러 올라가면 송악면 강당리 85번지에 강당사(講堂寺)가 있다. 이 강당사는 원래 외암 이간이 강학을 하던 외암정사(巍巖精舍)였다. 개인 서재나 사숙은 생활공간인 마을에 두지 않고 마을에서 떨어진 경관 좋은 곳에 입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마을에서 태어난 이간 선생은 자신의 학문을 강학하기 위하여 주변에서 비교적 경관이 빼어난 강당골 냇가에 서재를 건립하였던 것이다. 관선재에 강당이 있어서 이 골을 ‘강당골’이라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 33년(1707)에 세워진 외암정사는 추사 김정희가 쓴(혹은 수암 권상하의 글씨라고도 함) ‘관선재(觀善齋)’라는 편액 때문에 관선재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말기의 온양군 읍지에서는 천서 윤혼과 외암 이간이 이곳에서 서로 강학을 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1802년 외암 이간이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문정공의 시호가 내려지자 향유들이 그를 관선재에 배향하면서 외암서사라고도 일컬어졌다. 그 후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서원을 정리할 때 훼철대상이었으므로 이를 피하기 위하여 외암서사(巍巖書社)를 강당사라는 절로 바꾸고, 공주의 마곡사에서 불상을 모셔다 안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강당사는 본래 유학을 강론하던 자리에 불사가 마련된 곳이므로 사찰의 품격이 가람형태 보다는 서원, 혹은 조선시대 명문의 사가(私家) 형태를 취하고 있다.

사찰은 동향의 사면을 정지하고 조영되었으며 현재 전체 배치는 ‘ㅁ’자형을 하고 있다. 건물 구성은 인지헌(仁智軒)이란 현판이 걸려있는 본래의 건물과 함께 그 정면에 법당과 절의 입구에 해당하는 솟을대문 형식의 건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근년의 보수 시에 ‘숭정후세삼을유삼월이십일일묘시중수상량(崇禎後歲三乙酉三月二十一日卯時重修上樑)’이라는 상량문이 발견되어 영조 41년(1765)에 중수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현재 강당사는 관선재의 편액이 여전히 걸려있고 외암집 목판각 285매가 보관되어 있다.

외암집 목판각은 이간의 문집인 『외암집』을 새긴 목판으로 각 면당 10행 20자의 행자수로 균일한 형태이며, 사주쌍변의 광곽에 판구는 화구로 상하향 삼엽 화문어미의 형태이다.

목판은 관선재를 정비하면서 다시 강당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판각이 있는 강당사의 정문에 걸린 현판에는 ‘문천사’라 쓰여 있다. 이것은 외암 이간의 문중인 예안이씨와 파평윤씨 문중에서 합의하여 쓴 것이라 한다. 현재 목판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자료로 지정(1994. 11. 4.)되어 있다.

외암 이간선생 사당

건축형태를 갖춘 외암마을의 의례·신앙적인 시설로는 외암 이간선생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은 마을 안길을 따라 들어가다가 거의 끝 부분에 위치해 의례적 공간질서를 형성하고 있다. 이 밖에 각 주택에 따라 직계 선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동족마을이지만 후대로 내려오면서 분파 되어 직계 선조를 모시고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 동족마을의 공동시설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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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과 느티나무

민속신앙시설에는 마을 입구에 세워둔 장승(長丞)과 정자목이 있다. 장승은 흔히 마을 동구를 표시하고 역신(疫神)을 물리치는 신앙 표시와 함께 수구(水口)가 범람하지 않기를 기원하는 기능을 담당하기도 한다. 외암마을에 설치된 장승 또한 수구에 위치하는 ‘수구막이’와 마을 입구를 나타내는 동구신(洞口神)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안길 초입에 위치한 느티나무 정자목은 주민들이 매년 이 나무신에게 제사를 자냄으로서 마을의 부정을 없애고 질병이나 재앙을 막아주는 상징적 공간이 되고 있다.

외암 이간선생 묘역과 신도비

외암 이간선생의 묘역은 외암마을 서쪽 100여 m 떨어진 구릉에 서향으로 위치해 있다. 외암 이간 선생은 1727년 윤 3월14일에 별세하였고, 그 해 5월에 온양군 유곡에 장례를 치루었다가, 1791년 3월에 외암리 북쪽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묘역 주위는 소나무가 울창하게 잘 가꾸어져 있다.

외암 이간선생 신도비는 외암 이간선생이 돌아가신지 198년이 지난 1924년 3월에 세워졌으며 마을 입구 반석교를 건너기 전 오른쪽에 있다. 방형의 대좌 위에 오석의 비신을 세우고 팔작지붕 형태의 이수를 올려 놓았으며, 비의 전체 높이는 3.75m이다.

비문은 지돈녕부사 홍직필(洪直弼)이 찬(撰)하고, 전판돈녕부사 윤용구(尹用求)가 서(書)하였으며, 외암 이간의 6세손이며 참판을 지낸 이정렬(李貞烈)이 전(篆)하였다. 후기는 사손 이용헌이 기하고, 6세손 이욱렬이 서하였으며, 비문 건립 시의 유사는 이용빈, 이용후, 이명렬 등이었다.

원래 신도비는 묘비의 일종으로 무덤 근처나 큰 길가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이른바 신도(神道)라고 하는 동남쪽을 향하여 세웠으므로 신도비라고 일컬으며, 고위 품계를 역임한 인물에 한하여 건립을 허용하는 제한규범이 있었다. 외암 이간선생 신도비의 경우에도 처음 설치 위치는 현 장소가 아닌 마을의 서쪽에 있는 외암 이간선생의 묘역 50여m 전방 속칭 삼상당의 평평한 대지에 세워졌던 것이 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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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과 석각

반석(磐石)은 마을의 입구에 있는 바위이다. 반석이 내 바닥에 깔려 있고 마을쪽에 ‘외암동천(巍巖洞天)’과 ‘동화수석(東華水石)’이라는 석각(石刻)이 있다. 동화수석 석각은 높이 50cm, 너비 2m의 크기인데, 두께 50cm 정도 되는 자연석에 우측에서 좌측으로 동화수석이라고 큰 글씨로 새겼으며, 그 우측에 기미(己未), 그리고 그 좌측에 이백선서(李伯善書)라고 작은 글씨로 새겼다. 이백선은 예안이씨 21세손으로 교수댁에 살던 인물이며, 그의 생몰년을 고려해 볼 때 기미년은 1919년으로 추정된다.

외암동천 석각은 높이 52cm, 너비 175cm의 크기인데, 두께 50cm 정도 되는 자연석에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외암동천이라고 큰 글씨를 새겼으며, 그 끝에다 세로로 이용찬서(李用瓚書)라고 작은 글씨로 새겼다. 글을 새긴 이용찬은 예안이씨 20세손으로 외암 이간의 직손이며, 건재(建齋) 이욱렬(李郁烈)의 3남으로 이승만 정권 당시 판사를 지냈던 인물이다. 외암오수(巍 巖五水)의 하나인 반계(磐溪)라는 명칭과 반석(磐石)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용추와 석각

용추(龍湫)는 송악면 강당리의 안쪽, 멱시 아래 냇가에 있는 못이다. 옛날에 용이 올랐다 하는데, 산이 높고 골이 깊어 경치가 아름답다. 바위에 ‘산고무이동침화양(山高武夷洞沈華陽)’ 여덟자를 새기었는데, 왜인(倭人)들이 동침화양의 글자를 거꾸로 따서 양화담(陽華潭)이라 하여 널리 알렸다. 이곳은 오늘날에도 인근에 널리 알려진 피서지인데, 예전에도 외암리의 선비들이 세족(洗足)을 하기 위해 자주 찾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용추의 바위 곳곳에 이용헌(李用憲), 이주열(李周烈), 윤태희(尹泰熙), 이욱렬(李郁烈), 이백선(李伯善) 등 외암리 출신 선비들 이름이 새겨져 있다. 외암 이간의 「외암기」에는 석문용추(石門龍湫)라는 표현이 보이며, 한시 외암오수에도 용추가 포함되어 있다.